* 다음 글은 글쓴이의 허락을 받았음.
[삼상 5:1-5] 하나님이 이기십니다(God wins).
요즘 마음이 참 울적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한 일로 여겼던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꿈에 부풀어서 대학 새내기가 되었는데 학교 캠퍼스도 제대로 밞아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고, 여러 가지 스펙을 쌓고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준비했던 유학이나 자격증 시험 등이 취소되거나 일정이 변경되어 심란한 분들도 계실 것이며, 심지어는 원치 않는 상황에 빠져서 격리되거나 여러 가지 곤란한 일을 겪으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닌 상태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이것을 새로운 일상생활로 여기고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우울한 시대, 누구도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분명히 “우리는 답을 찾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요.” 그러나 가만히 기다린다 해서 답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발견한 답이 반드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답이 되지 못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답을 찾기 위한 노력마저 멈추는 것은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한 부분을 바탕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오늘 드리는 말씀이 뉴-노멀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석관동이라고 하는 지역에 있는 한 교회의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는 일개 목사에 불과하고, 제가 가진 관점에서의 문제 파악과 그에 대한 해결책은 제가 속한 공동체에 국한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함께 말씀을 나눔으로써 현 상황을 보는 관점과 그에 대한 해결책의 일부분을 공유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대비하는 데 있어서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다면 정답을 찾기 위한 한 걸음을 함께 내딛는 시도를 했다는 자부심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전의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이고, 그것이 사회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상황은 제가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의 배경이 되는 시대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오래 전,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를 아직 온전히 벗지 못하고 치열하게 영토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총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엘리 제사장이었으며,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주적이었던 블레셋군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비해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이 패퇴합니다. 이에 홉니와 비느하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이 모시고 있던 언약궤를 실로에서부터 전쟁터로 가지고 와서 그것을 앞세워 블레셋과 싸우기로 한 것입니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 큰 소리를 지르며 블레셋 군대를 무찌르기 위해 달려 나갔습니다. 이에 블레셋 군대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대항했고, 결과는 이스라엘의 참패였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을 비롯해서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고, 언약궤는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비느하스의 아내 역시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언약궤를 빼앗긴 소식을 듣고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가봇’이 되었으며, 그 뜻은 “모든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버렸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리더십이 사라졌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블레셋의 손에 넘어갔으며,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하에 오늘 읽었던 본문 이하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국가 간 전쟁의 승패는 각 나라가 섬기는 신의 능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그들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보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블레셋은 다곤의 능력을 힘입어서 승승장구하게 될 것이고, 여호와가 사로잡혀 다곤의 포로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은 점차 힘을 잃어 망하게 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전리품으로 획득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아스돗 지역에 있던 다곤의 신전에 넣어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곤의 신상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 신상을 일으켜 세웠지만 그 다음 날 아침에는 그 신상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두 손이 끊어진 채로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일들은 더 놀라웠습니다. 언약궤를 가져다 놓았던 아스돗 지역에 전염병이 돌게 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아스돗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더니 가드 지역에 전염병이 돕니다. 결국 그들은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리를 가져왔다고 믿은 다곤이 산산조각 났고, 다곤의 지배하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은 무섭고 강한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졌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지지 않으셨고,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떠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블레셋의 신을 치시고 그 민족들을 심판하신 후 자기 영광의 자리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가장 먼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 혹은 실패가 절대로 하나님의 부재나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리더십이었던 엘리 제사장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나라를 통치해야 할 두 아들도 죽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까지 빼앗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든 영광이 떠나버렸다, 이 세상은 끝났다!’ 라고 외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모습입니다.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패배하지 않으셨음을, 그가 절대로 이스라엘을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일들이었습니다. 그 일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셨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우리가 여태껏 ‘정상적이다’ 혹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일에 큰 변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상황을 보면서 부정적이고 암울한 미래상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누리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입생 오티부터 시작해서 과별 엠티, 불꽃 튀는 사랑 놀음 등 캠퍼스에서 경험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탁월한 실력을 가진 교수님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며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할 수업들이 온라인 영상으로 진행되면서 교수님과 학우들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업의 질 역시 현저하게 낮아져 버렸습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업이라 여겨졌던 정유, 항공, 관광 등 경제 발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사업들이 망해갑니다. 이전에 자연스럽게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화려한 추억으로만 남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디스토피아일 것만 같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죽어간 비느하스의 아내와 같은 심정으로 세상을 비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거나 실패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택한 백성을 버리고 떠나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기고 모든 리더십을 잃어버린 채 제대로 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의 중심지에서 그들의 신을 꺾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신 후 영광 가운데 이스라엘로 돌아오셨습니다.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놀라운 일들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블레셋을 치고 돌아오신 것으로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영광을 되찾으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리더십을 허락하시고 새로운 질서 가운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이용해먹으면서 권력을 누리며 살았던 제사장의 후손을 대신해서, 그 아래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배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대언했던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정한 죄를 지은 일부 범죄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미스바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했습니다. 율법과 규례에 순종하며 살아가지 않고,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던 삶을 돌이키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블레셋 사람들에 대항해 칼과 창을 들고 맞서 싸우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그들을 무찔러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기준에 따라 자기 능력으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살아간다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셨고, 사무엘이 지도자로 있는 동안 블레셋 군대가 다시 대규모로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가 사라지고 절망이 가득한 미래가 오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오히려 그전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지고 언약궤를 빼앗기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사회 질서를 세우며,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이미 오래 전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과 규례의 말씀들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방 민족들이 자기 신들을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패배했고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삶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잘못에 대한 형벌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바른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변화시키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다곤을 꺾으시고, 스스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시며,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셨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은 혼란과 고통이 가득했던 사사 시대를 끝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방식 즉, 세상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지금까지의 삶이 타격을 받고 강제적으로 멈출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질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의 태도를 지니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비의 조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분명히 이를 위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 역사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위해 실제적으로 어떻게 우리 삶의 방식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으로 바꾸어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내용들을 나눔으로써 설교를 맺겠습니다.
첫째, 다른 어떤 것보다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철저히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동안 신앙이 좋다는 칭찬을 듣는 사람들은 예배에 많이 참석하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헌금을 많이 내고, 높은(?) 직분을 얻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 가운데 그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나누고 있는지의 여부는 살펴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일은 천사들을 통해서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무생물들을 통해서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눌 백성들을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교회에서 만들어 준 어떤 모임이나 행사들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골방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분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어떤 말보다도 게리 토마스가 지은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CUP, 2003)는 책을 읽어보고 그 책에서 소개하는 9가지 영적인 기질 검사를 통해 자기 영성의 색깔을 찾아가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내가 속한 교회의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교회의 예배는 마치 쇼핑몰의 진열 상품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내가 편한 시간에 맞춰서, 내 취향에 맞는 형식을 따라, 내가 듣고 싶은 스타일과 내용의 설교를 듣는 것을 가리켜 은혜를 받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예배의 횟수가 많아지고, 형식이 다양해지고, 개인의 성향이나 사회적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기 쉬워졌습니다. 거기에 더하여서 내 마음에 드는 교회의 여러 가지 모임이나 행사, 봉사 활동 등이 예배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예배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과정 정도로 여겨집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현장예배를 지양하고 온라인 예배를 장려하다 보니 더욱 더 내 입맛에 맞고 내 형편에 맞는 시간과 장소에서 내 맘대로 예배를 선택해서 드려주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내 심신의 평안과 정서적 혹은 영적 만족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예배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횟수의 예배를 드렸느냐, 얼마나 많은 모임이나 활동을 했느냐, 얼마나 열정적이고 주도적으로 예배에 참석했느냐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코로나로 인해 다른 활동들이 정지될 수밖에 없는 이때에, 하루라도 빨리 다른 활동들을 재개하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어디인지 돌아보고 바른 예배자로 서는 기회를 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회에 속한 성도로서 가장 힘써야 할 부분입니다.
셋째, 여러분 각자가 속해 있는 여러 사회 조직들 안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절대로 혼자 사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교회에서 만들어놓은 소그룹 활동, 성경공부, 봉사 활동, 단기선교 등에 참여하며 그 과정들 속에서 성숙해져 가는 것이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조직을 통해 그런 일들을 진행하는 것이 무척 어렵고, 사회적 책임의 면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믿음을 가진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공동체가 나를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음의 공동체를 불러일으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속해 있는 모든 곳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면 됩니다. 예전에는 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집에서 일이 있을 때 교회에 가야만 한다고 말하며 교회에 와서 시간을 보내면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학교 모임과 교회 모임의 시간이 겹칠 때 교회로 가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회사를 다닐 때도 교회를 가야 하기 때문에 야근을 하지 않고 주말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분리함으로써 믿음을 표현하는 경우 자칫 잘못하면 이분법적인 율법주의에 빠져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잘 맺고 있다고 착각하게 될 수도 있고,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 등 같은 사회 조직에 속한 이들에게 소외감 혹은 배신감을 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삶의 태도의 핵심은 성실과 정직입니다. 주어진 일들을 하나님께 충성하듯이 성실하게 감당하고, 내게 불이익이 된다 할지라도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 정말 간단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그 모습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도 성실하게 맡은 일을 잘 하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인정하고 칭찬해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로 그런 사람들보다 더 성실하고 더 정직한 삶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가족 행사를 치러야 할 때, 성실하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되 정직하게 마음과 몸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도록 대화하십시오. 여러 모임의 시간이 겹쳤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우선순위를 결정해서 모임에 참여하십시오. 단,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도록 노력하십시오. 직장에서 일할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핑계로 내 편의를 챙기지 마시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게 더 큰 이익이 되는 일을 과감하게 다른 이에게 넘겨주고 더 적은 이득, 심지어 손해를 보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일에 앞장서서 참여하십시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SNS 활동 가운데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경험했던 은혜들을 가감 없이 올리고, 좋아요가 없어도 상처 받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보기 좋고 내 기분 좋으라고 하는 SNS 활동이 아니라 하루하루 나의 삶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은혜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기록하는 일기장으로 활용하십시오. 그 가운데서 같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진짜 믿음의 동역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안들은 우리 각자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함께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한 영화의 대사를 인용합니다. “우리는 길을 찾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완전히 망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새로운 시대를 여신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우리 가운데도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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