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19시대의 캠퍼스 및 청년 공동체의 성찰과 방향(시리즈 강연 5)
김유준목사, 차세대연구소장, 연대 및 한신대 겸임교수
주의 은혜의 해를 실천하는 희년 공동체
20200729 광운수요채플
(본문: 수정없는 원문 전체아래)
<포스트 코로나 19 시대의 캠퍼스 및 청년공동체의 성찰과 방향> 광운대학교 수요채플
주의 은혜의 해를 실천하는 희년 공동체
김 유 준 목사(은진교회, 연세차세대연구소장, 한신대 겸임교수)
Ⅰ. 들어가는 말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전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절망의 늪에 빠져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두려움과 질병의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과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감염의 위험 때문에 병문안을 통한 위로로 못해주고 장례식에서 함께 슬퍼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코로나19 사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측할 수 없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막막함과 불안함 가운데 휩싸여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무언가를 해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이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거나 홀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삶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함께 살아가는 기쁨으로 여러 모임도 가지고 외식도 하고 여행도 즐겼지만 이제는 타인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라도 홀로 가족이나 지인과의 깊이 있는 만남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내면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좁히는’ 시간이기 도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진정한 고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진정한 쉼과 침묵은 주님께서 명하신 안식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을 지킴으로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저항이요 대안적 행위이자 평화로운 행위”라고 했습니다. 물신만능주의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첫 번째로 선포하신 “주의 은혜의 해”(눅 4:18-19)는 구약의 안식년과 희년을 포함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타인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모든 불의와 죄악을 끊어버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며 살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면제년이라고도 불리는 안식년을 통해 땅의 안식과 함께 모든 종과 노예를 해방시켜주고 이들의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 주는 해였습니다. 그리고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50년째에는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여 토지를 반환함으로 각자가 천부인권으로 받은 땅의 권리를 되찾는 희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자연이 함께 쉼과 안식을 누려야 하는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은 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심판을 받아야만 했음을 기억합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신음하고 있던 자연이 되살아나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경제적 이익과 개발로 고도성장을 추구해 온 인간의 ‘탐욕스러운’ 활동이 멈추자 공기와 강, 주위 환경이 깨끗해지고 동식물들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멈춤이 곧 신음하던 자연의 회복과 치유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7년마다 안식년을 지켜왔다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얼마나 더 아름답고 온전히 회복되었을까요. 이제 한국교회는 주님께서 선포하신 “주의 은혜의 해”가 더 이상 이상적 구호가 아닌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실천하고 살아가야 하는 대변혁의 토대가 되어야 함을 봅니다.
인생의 공허함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추앙은 정말 달콤하고도 매력적인 유혹입니다. 자부심은 물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찬사와 칭송, 그러한 인정과 환호를 뒤로 한 채, 오직 홀로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허한 인생이 아닌 고독한 인생을 선택하셨습니다. 고독한 인생은 진정한 홀로서기를 할 때 가능하며, 그 고독의 순간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고독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우리의 소망을 둘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대부분 고독의 유익을 알지 못한 채, 고독을 공허함으로 간주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거나 기억해주지 않는 쓸쓸하고 외로운 상황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독이 무서워서 부단히도 새로운 만남과 사귐을 찾아다닙니다. 그들은 홀로 있을 수 없어서 사람들 사이에 함께하기를 갈망합니다. 사실 현대인들이 찾는 것은 진정한 사귐이 아니고, 자신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달래며 잊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주길 바라는 목마름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만족과 채움은 훨씬 더 심한 외로움과 공허함 앞의 일시적 위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공허함 속에서 무언가를 채우려고 할 때, 독이 든 양분처럼 자신의 내면은 갈증과 절망 속에서 서서히 말라비틀어지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고독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 영혼은 다른 사람들과의 진정한 교제와 만남도 누리지 못합니다. 결국 영혼 깊은 외로움과 절망으로 신음하며 죽어갈 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들을 양식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계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함으로 매일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구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 홀로 계심으로 묵묵히 주님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송과 환호가 오히려 십자가의 길에 방해가 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며 환호하는 수많은 무리들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습관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계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와의 진정한 사귐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코이노니아와 사랑이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대로 고난의 삶과 십자가를 짊어지신 원동력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구나 최후의 심판 때, 주님 앞에 홀로 섭니다.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홀로 하나님과 결산을 하게 됩니다. 그때는 그 누구에게도 핑계를 대거나 누구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홀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참된 고독의 자리로 ‘홀로’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물리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분의 진정한 사귐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홀로 있음 없이 진정한 사귐을 바라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질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고독의 기쁨과 비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수많은 만남 속에서 공허함으로 허덕일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안식과 쉼을 통해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독과 침묵은 듣는 침묵이요, 겸손한 침묵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매인 침묵입니다. 고요함 중에 우리는 깨닫는 힘, 영혼을 맑게 하는 힘,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독은 주님을 갈망하는 침묵이며, 주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귐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인생의 위대한 시간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본질과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진정한 존재감과 자존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인생의 고독은 깊이 있는 경건의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게 하는 최고의 신앙이자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러한 신앙인야말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Ⅱ. 구약성서에 나타난 주의 은혜의 해
1.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인 공평과 정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그와 그 자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지켜 행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8-19).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것도(창 12:1-3) 바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도 공평과 정의입니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이사야 5:1-7에 나오는 포도원의 노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신 핵심도 공평과 정의였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 등 대부분의 선지서는 공통적으로 예배나 집회로 모이지 않아서, 헌금을 제대로 드리지 않아서 책망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종교적 행위는 열심을 냈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 곧 통치원리인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와 악행으로 이웃과 동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죄악을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그것을 회개하여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 강력히 촉구하신 것입니다.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2-17).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1-24).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도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공평(미슈파트)이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공평을 간구한 솔로몬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그 외에도 많은 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고난 중에 욥을 찾아와 마지막으로 조언한 엘리후의 최후 결론도 공평과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했습니다(신정론).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욥 37:23-24).
2. 주의 은혜의 해인 안식년과 희년
[안식년] “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3.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4.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5.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6.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7.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레 25:1-7).
[희년]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레 25:8-12).
희년이 속죄일에 선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신 것도 바로 이미 선포하신 희년을 성취하고 완성하려 함이셨습니다.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의 공평(미슈파트)과 정의(츠다카)와 사랑(헤세드)에 입각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하신 것도 가난한 이들이 송파 세 모녀 사건과 달리,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스스로 땀 흘려 자신의 양식을 구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땅주인이 나눠주는 양식이 아닌, 아무리 가난해도 7년마다 스스로 양식을 마음껏 구할 수 있는 “주의 은혜의 해”입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안식년 이후 3년마다 소출의 십일조를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이들에게 제공하여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즉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형편일지라도 안식년 이후 3년, 6년이 되는 해에는 동족들이 거둔 소출의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했고, 7년째인 안식년에는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양식을 구했습니다.
안식년에는 빚을 면제해주고 종을 해방시켜주는 해이고(신 15:1-18), 희년에는 원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고향으로 돌아가는 해입니다. 즉 부채탕감과 종 혹은 노예해방은 7년마다 이루어진 것이며 토지반환은 50년마다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토지반환도 자신이나 근족의 도움으로 기간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면제년]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1).
[종/노예해방]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 15:12-15).
3. 안식년과 희년의 실천 사례
부채탕감과 종을 놓아주는 것은 출애굽의 구속의 역사에 근거합니다. 출애굽 역시 거시적인 의미의 안식년과 희년이 성취된 주의 은혜의 해였습니다. 노예해방과 부채탕감, 그리고 잃어버린 약속의 땅을 회복하는 과정이 바로 출애굽과 가나안 진군의 과정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출애굽 사건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의 구속을 기억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날이라면 안식년과 희년은 하나님의 구속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해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은 영적 출애굽이자 본질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성취하신 주님의 은혜의 해입니다.
룻기 4장에서 나오는 고엘 제도가 좋은 예입니다(룻 4:1-12). 고엘은 ‘토지 무르기’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 단어는 영어로 ‘redemption’인데, ‘구속’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속자(redeemer)가 되셨다는 것은 구약의 원어의 의미로 보면 바로 우리의 토지를 물러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고엘이 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이 땅에서 땅 없는 이들의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경제적’ 토지 무르기는 물론, 잃어버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되찾도록 돕는 ‘영적’ 토지 무르기를 함께 해야 합니다.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왕상 21:1-4).
이세벨을 통해 바알 숭배를 끌고 온 악한 왕인 아합도 나봇의 포도원을 함부로 빼앗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원리로 보면 정당한 요구이고 오히려 통치자의 요구이기에 적극 수용할만한 매력적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낱 농부에 불과한 나봇이 그 당시 막강한 절대군주 앞에서 토지매매를 당당히 거부했습니다. 그것도 바로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임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말씀, 즉 희년의 토지법에 근거하여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나봇의 답변에 아합 왕도 어쩔 수 없어 돌아갔다. 아합 왕도 서로 다른 지파와 가문끼리는 토지 매매를 해도 다시 돌려줄 수밖에 없음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희년의 토지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덟 살의 나이에 남유다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평가를 받은 요시야의 개혁도 희년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26세에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한 요시야는 모든 백성을 모아 놓고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고 철저히 지켰다(왕하 22-23장). 신명기 31장 9-13절에 보면 모세는 죽기 전에 마지막 지시로 7년마다 율법을 읽어주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했는데, 7년은 바로 안식년이자 면제년으로 부채탕감과 노예해방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요시야를 비롯해서 느헤미야(느 9:3)가 율법을 낭독하면서 행한 구체적 회개의 내용은 우상을 멀리한 것과 함께 면제년마다 행해야 했던 부채탕감과 노예해방의 율법을 함께 준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신 31:9-13).
창세기 47장에 나오는 7년간의 기근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애굽 땅에 하나님의 토지법을 세우셨습니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창 47:26). 즉 대기근을 통해 모든 토지의 실질적 소유권이 바로 왕에게로 모아져 국유지 개념이 되었고, 제사장의 토지를 제외한 애굽의 모든 백성은 토지사용료로 20%의 지대로 조세를 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지대조세를 거두는 최상의 기준으로 제시한 20%가 요셉을 통해 세워진 애굽의 토지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지공주의 경제학자들이 지대의 20%만 거두어도 어느 정도 경제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Ⅲ. 신약성서에 나타난 주의 은혜의 해
1. 예수님의 사명선언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첫 번째 공식적 설교에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감당하실 것인지에 대한 비전과 사명이 담겨 있는 예수님의 핵심사상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통해 가난한 자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는 안식년과 희년을 모두 포함합니다. 즉 부채를 탕감해 주고 종을 해방시켜주는 면제년 혹은 안식년을 포함하여, 분배받은 토지를 돌려받아 진정한 자유를 맛보는 희년을 모두 일컫는 해입니다.
2.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문)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입니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죄 사함, 즉 빚 탕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이웃을 위한 기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세 가지 내용 중에서 그 중심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향한 세 가지 기도 중에서 그 중심에서 죄 사함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죄 사함에 대한 내용을 바로 이어서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마태복음 5~7장에 걸친 산상수훈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구하는”(마 6:33) 것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실천하는 이웃과의 구체적 내용이 바로 죄 사함과 용서입니다. 그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다른 비유의 말씀과 연관지어보면 부채탕감과도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구하는 제자도의 중심에 죄 사함 혹은 부채탕감이 있습니다.
3. 죄 사함과 부채탕감의 직접적 관계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1-35).
예수님께서는 죄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을 듣고, 바로 빚 탕감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32-33에서 빚을 전부 탕감하여 준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즉 죄 용서는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빚을 전부 탕감함으로 입증됩니다. 죄 용서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수십 수백 번 용납하고 마음으로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초래한 경제적 손실까지 감수하며 그들의 채무까지 완전히 탕감해 주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야고보서에서 지적하는 사랑의 실천이 수반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 믿음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부채탕감은 특정한 소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라,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동체 차원에서 ‘실천해야 하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부채탕감은 단순한 자비나 자선을 촉구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의 차원으로 확대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원리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빚을 탕감하지 않은 자를 옥에 가두었고, 그 죄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공평과 정의에 입각하여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희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통해 생계형 채무자와 의지할 데가 없는 약자보호를 위한 공동체적 형제애와 사랑의 실천을 촉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나 주기도문 속에는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에 대한 형제애 차원의 부채 경감 혹은 완전한 탕감을 촉구하셨습니다. 반면 신앙공동체 내에서 이를 수행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복수를 경고하셨습니다.
4. 아버지의 사랑을 통한 희년성취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말씀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날의 경제체제에 익숙한 현대 그리스도인이 이 비유의 말씀을 볼 때마다 자신의 재산을 이미 허랑방탕하게 허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다시 품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첫째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감동적일지라도 자기의 몫을 이미 다 챙겨간 동생에게 다시 그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것은 결국 자신이 유산으로 ‘덤으로’ 받을 몫을 떼어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12에 보면, 동생의 요구로 인해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기에” 형도 결국의 자신의 재산을 다 챙겨 놓은 상태였습니다.
잃어버린 양, 동전, 아들에 대해 연속적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참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알려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세 번째 비유는 희년의 세 가지 핵심 원리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은 타국의 종으로 살면서 굶어 죽을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지은 죄를 깨닫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회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채무에 시달려 종살이를 할 필요도 없고, 토지의 권리까지 다시 누리게 되는 희년의 구체적 성취였습니다.
특히 이 비유의 말씀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 재산을 탕진했는지 캐묻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즉 가정과 삶의 공동체 내의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약자를 희년의 부채탕감과 노예해방, 그리고 토지권리의 회복을 통해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와 구체적 실천지침을 알 수 있습니다.
5. ‘불의한 재물’로 부채를 절감해 준 청지기
이 비유를 주석한 기존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는 그리 명쾌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주인은 바보, 청지기는 사기꾼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을 들은 주인은 청지기를 정리해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로 채무자들의 부채를 경감해주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그를 칭찬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낭비하는 증거를 확보한 순간인데, 오히려 그를 칭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절에 나오는 주인의 ‘소유’(ὑπάρχοντα)는 마태복음 19:21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부자청년에게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그 ‘소유’와 동일한 단어이며, 누가복음 19:8에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 삭개오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라고 말할 때 사용된 용어와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비유에서 1절의 ‘소유’는 9-11절에 주인을 통해 언급된 ‘불의한 재물’(unrighteous mammon)과 동일한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본문을 통해 나타난 ‘소유’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용어로 사용되기에, 청지기가 낭비한 소유는 다름 아닌 주인의 불의한 재물, 즉 불의한 방식으로 벌어들인 돈이나 토지와 천연자원에서 발생한 불로소득으로 공동체 모두가 누려야 하는 공유재산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1절에서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는 말씀을 통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것은 문맥상 불로소득을 공동체에 환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소위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으로 정리해고를 당했지만, 불의한 재물인 불로소득으로 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러 그들의 부채를 경감해 줌으로 주인에게 칭찬을 받게 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마태복음 18장에 언급된 마태공동체는 채무를 완전히 탕감해주는 100%의 부채탕감이 본으로 제시되었지만, 누가복음 16:1-16에 언급된 누가공동체는 채무자의 부채 50%와 20%를 절감해주는 부분탕감, 즉 부채절감의 사례가 제시되었습니다. 삭개오가 회개의 표시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 놓은 것을 통해서도 그들의 부채탕감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6. 공동체에 반환해야 할 부자청년의 재물
마가복음 10:17-28에서 22절의 재물은 헬라어로 ‘크테마’(κτῆμα)로서 일반적인 부와 재산을 의미하는 ‘크레마’(χρῆμα)와는 달리, 포도원이나 농장과 같은 대토지를 사유함으로 발생하는 불로소득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사도행전 2:45에서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에 사용되었으며, 사도행전 5:1에서도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에 사용되었는데, 문맥상 땅 값을 의미합니다. 즉 50년마다 희년을 맞이하면 토지의 원주인에게 반환해야 하는 초과분의 토지에 대해 돌려주지 않고 계속 그곳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불로소득을 독식하는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 공동체도 이러한 대토지를 사유함으로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대해 마땅한 반환,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촉구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말하면, 비록 물질적으로나 현재 합법적으로 누군가 그렇게 할 수 있을 지라도, 어느 누구도 단지 “거기에” 있는 물건들(광활하고 거대한 토지, 혹은 다른 그러한 부를 생산하는 자원들처럼)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소유지처럼 대다수의 경우, 토지 권리는 여러 세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최초의’ 권리는 대부분 약탈이나 강압에 기초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불공평과 불평등은 분명히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초래된 것입니다. 특히 토지와 같은 공유물에 대한 사적 독점은 강도죄입니다. 그러므로 대토지를 사유함으로 발생하는 막대한 지대를 착복하는 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도둑질입니다. 막대한 부는, 특히 토지로 인해 발생하는 지대와 지대차액 등의 불로소득은 공동체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기에 반드시 궁핍한 자들과 함께 공유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제자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갈급함을 품고 있던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로 부르셨음에도 막대한 불로소득을 누릴 수 있는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그 부름을 거절하고 근심하고 떠나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희년의 실천 여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구원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7. 삭개오의 자발적 나눔과 불의한 재물 반환
누가복음 19:1-10에서 악착같이 인생의 성공을 위해 달려온 삭개오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숏 다리’ 콤플렉스로 자신이 늘 무언가를 딛고 일어서야만 했던 그 인생을 향해 예수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서라”고, “나는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기뻐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늘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세리장으로서 동족을 착취해왔던 인생에서 이제 집안을 개방하고 그들과 잔치를 베풂으로 인생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돈이나 권력이 참된 기쁨이 아님을 알았기에,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일에 대해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반환과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은 자신의 재물에 대한 예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 더 이상 움켜쥐고 쌓아놓는 것이 아닌, 이웃을 위해 특히 궁핍한 자들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 삶, 게다가 불의에 대해서는 마땅히 반환하는 삶을 살게 됨을 보여줍니다. 키 작은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유를 나누고 불의한 재물을 반환함으로 자발적 희년을 실천한 것입니다.
Ⅳ. 초대교회 공동체에 나타난 주의 은혜의 해
1. 초대교회의 자발적 희년실천
사도행전 4장은 성령강림으로 탄생된 초대교회의 자발적 희년실천이 나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불의한 경제체제 속에서 땅이나 집을 팔아 공동소유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줌으로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행 4:34-35). 구약의 토지분배에 의하면 토지를 분배받지 못한 레위 지파에 속한 바나바가 밭을 팔았다는 것은 신앙의 열심에 의한 자선이나 구제 차원이 아닌, 희년의 토지법에 근거하여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지파의 사람으로서 불의하게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사도들 발 앞에 둠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마땅히’ 반환한 것입니다.
바로 이어서 사도행전 5:1-11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토지불로소득에 대한 자발적 희년을 실천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탐욕에 빠져 재물의 노예가 되어 성령 하나님을 속여 심판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향한 전쟁 가운데, 아간이 취하지 말아야 할 재물을 탐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전쟁에서 패한 것처럼, 공동체가 함께 누려할 것, 혹은 자신이 취하지 말아야 할 재물에 탐욕을 부리는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2. 바울의 희년실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성도들의 구제와 헌금을 통해 서로의 궁핍을 채워줌으로 균등(ἰσότης) 혹은 평형(equality)이 이루어지길 원했습니다. 여기서의 균등은 단순히 결과적 평등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의 이상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출 16:18)처럼,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처럼, 공동체 모두가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길 원했습니다(고후 8:15).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3-14).
빌레몬서 1:8-22을 보면 오네시모의 인생을 통해 바울의 희년사상이 가장 명확하고도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종’ 혹은 ‘노예’는 인권이 아닌 물권에 해당됐기에 주인 마음에 따라 언제든지 ‘처분’ 가능한 물건이었습니다. 도망친 종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방조자도 심한 벌을 받았습니다. ‘유익한 자’ 혹은 ‘쓸모 있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오네시모는 그 이름의 뜻과는 대조적으로 주인인 빌레몬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을 친 ‘무익한’ 종이었습니다(몬 1:11). 골로새에서 도망친 오네시모는 떠돌이 인생을 살다가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했고, 그곳에서 거듭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섬김을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희년을 그대로 실천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첫째, 회심케 하고 영적 지도자로 세워주며 섬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의 영적 아들이요(10절)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16절). 노년의 바울은 곁에 있는 동역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 친필로(19절) 서신을 보낼 만큼 각별한 사랑의 권고로 간청을 했고, 오네시모를 ‘유익한’ 동역자로 영접할 것을 요청했습니다(17절).
둘째, 정신적 억압과 육체적 사슬을 끊어주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쳐 나올 때에는 그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도망친 노예에게 응당한 처벌로 몰매나 사형 말고 다른 무슨 기대가 있었겠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16절)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인가요. 빌레몬과 오네시모 모두에게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었고, 그 당시의 로마법마저도 초월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결코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명령할 수도 있으나”(8절) 바울은 빌레몬을 향한 신뢰를 확인시키면서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21절)며 사랑으로써 권면했을 뿐입니다.
셋째, 바울은 오네시모의 경제적 문제까지 책임졌습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18절)는 말씀은 바울 자신이 오네시모를 위해 빚을 갚아 주겠다는 말입니다. 감옥에 매인 바울이 실제적으로 빚을 갚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희년에 정신에 입각하여 그의 부채를 탕감해 주라는 요청입니다.
이처럼 영적, 신체적, 경제적 세 가지 측면에서 오네시모를 회복시켜주고 섬긴 바울의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대속(고엘)의 십자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곧 ‘희년의 복음’입니다. 빌레몬서를 통해 바울은 희년의 핵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했습니다. 즉 빌레몬은 바울의 권고에 순종함으로써 노예해방과 부채탕감을 실천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쳐 나왔던 자신의 잃어버린 삶의 근거지,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지분까지 회복했습니다.
결국 오네시모는 부채탕감과 노예해방, 그리고 토지반환이라는 희년의 복음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주후 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초대교회의 유력한 영적 거점인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헌신하며(이그나티우스의 서신) 그리스도의 ‘유익한 종’으로 쓰임을 받는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Ⅴ. 나가는 말
어려운 상황에 빠진 모든 이들이 ‘이웃’입니다. 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길에서 죽어 가는 존재다. 영적으로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엡 2:4-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 오셨으며 고통스런 인간의 길을 따르셨습니다. 너나없이 원수 노릇을 했음에도 주님은 그 인간들이 고통당하는 걸 보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우리를 향한 사랑의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그저 위험을 감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틀 치 일당에 해당하는 두 데나리온 차원보다 훨씬 더 고귀한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십자가에서 단번에 청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투사된 위대한 사마리아인이셨습니다(눅 10:25-37).
이웃 사랑을 베풀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 내내 원망하고 적대시했던 그분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아야, 세상에 나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폭포수와 같이 부어주시는 한없이 높고 깊은 이웃 사랑을 실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거룩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강도만난 우리를 위해 친히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향해 강도만난 수많은 이들의 이웃이 되길 도전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주님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단지 교회 다니는 사람, 단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을 인간 이하로 대하는 모든 억압과 결박의 사슬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빚에 허덕이며 약탈적 금융제도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부채탕감의 복음의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 먼저 영적인 차원의 용서만이 아닌 채무자의 빚을 변제해주고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 양극화의 주범인 토지불로소득에 대한 환원을 제도화하는데 적극 앞장서야 합니다. 토지투기를 통한 불로소득의 살인적 죄악을 더 이상 교회와 그리스도인 범하지 않도록 회개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이러한 희년의 복음이 개인 차원만이 아닌 사회 구조와 제도적 차원까지 적극적인 개혁과 변혁을 위해 사명을 감당할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모두가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자, 이 땅의 나그네인 우리의 자만과 교만, 강퍅함과 무관심의 죄악을 자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사치와 안락을 내려놓고 집 없는 이들에게 우리의 집을 열어 주고, 멸시받고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우리의 재물과 기업을 함께 나누며 섬겨야 합니다. 고리대금과 악성 부채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부채탕감의 은혜를 체험케 해야 합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는 국가와 그 체제의 삶을 특징짓는 탐욕과 폭력, 그리고 구조적 악까지 거부합니다. 실천하는 신앙인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적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통한 변혁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류 문화의 지배적 가치와 체제 순응적 삶의 방식과의 단호한 결별을 촉구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재물을 내어 놓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은혜와 평강으로 친히 갚아 주실 것입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함으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로서 살아가며 희년 공동체를 세워가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즐거이 주님께 헌신되어 나아오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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